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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영농의 선구자 이희경 선생
작성자 : 이영희
내용 ■ 농업의 기술혁신을 실천한 이희경 선생


“백성들이 산업을 부흥시켜 생활을 즐기고 생산물이 풍족하여 생활에 대한 근심걱정이 없고서야 비로서 백성들을 禮義로서 권면하고 仁義로서 인도할 수 있다” 220여년전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의 한사람인 윤암 이희경의 주장이다


박지원이 쓴 ‘양반전’과 ‘허생전’엔 이용후생학파의 주장이 克明하게 나타난다. 성리학의 틀 속에 갇쳐 백성이야 굶던 말던 글만 읽고 풍류만 즐기려는 양반들을 호되게 비판하고 나라경제의 허점을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과 그의 제자들을 실학파 또는 이용후생학파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이 忠(충), 孝(효), 禮(예)만 외치는 당시 양반사회를 향해 백성들의 의식주부터 해결해 놓고 도덕을 논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용후생학파의 인물들 가운데 이희경은 그동안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가 지은 雪岫外史(설수외사)가 뒤늦게 발견됨으로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설수외사 또한 이용후생학파의 대표작인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박제가의 ‘북학의’등과 대동소이하나 다만 앞선 두 저서가 대개 도시의 상인ㆍ수공업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른바 重商的(중상적)사상을 띠고 있음에 반하여 이희경의 ‘설수외사’는 농업의 기술혁신을 통한 농민의 소득증대에 관심을 둔 重農的(중농적)사상에 그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희경은 深明物理(심명물리) 곧 “사물의 이법을 널리 밝게 연구하여 국민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자”는 과학적 사유를 그 근간으로 삼아 ‘이용후생’의 학문을 생활화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실학의 과학적 사고의 일단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이용후생의 학문을 실현하기 위해 무려 다섯 차례나 중국에 들어갔다. 이는 그곳의 진보된 문물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 이법을 배워 우리나라의 실생활에 직접 응용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農器圖(농기도)」를 저술한 것이나 龍尾車(용미거)를 직접 제작하여 손수 시험운행한 사실은 이용후생의 정신을 그 실천에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용후생학의 최고의 이론수준을 담은 ‘열하일기’나 ‘북학의’에 기술된 농업에 관련된 여러 이론들이 대부분 중국에서 견문한 내용이나 중국측의 관련저술을 소개한 것이고 우리나라의 실제 영농경험을 통해 이루어지지 못했던 점에 반하여 이희경의 ‘설수외사’는 그 자신이 직접 강원도 홍천에다 약간의 논밭을 장만하여 이곳에서 자신의 농업이론 예컨대 區田法(구전법) 같은 것을 실제로 실험하기도 하여 생활현장에서 경험한 생생한 농업이론을 제시한 것은 ‘열하일기’나 ‘북학의’의 이론적 취약성을 보완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북학의’의 구전법에 관한 이론이나 농기구에 관한 조목들이 대개 이희경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 것은 바로 이와같은 면을 반영한 것이다.


■ 강원도 홍천에 논밭을 장만해 직접 시험 경작해


“지금 우리나라는 사람을 임용할 때 오로지 문벌만을 따진다. 따라서 公卿(공경)의 아들이라야 공경이 되고 서민의 자식은 오직 서민이 될 뿐이다. 그 법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고 그 유래도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이미 부귀한 신분이 되어 농사일을 직접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콩과 보리 조차 구분하지 못한다. 한편 서민들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은 바도 없어 모두 까막눈에 무식쟁이다. 그리하여 오직 힘으로만 일할 뿐이다”이희경이 편찬했다는 ‘농기도’ 서문의 일부이다.


그는 “당시 양반사대부들은 孔孟, 程朱의 책이나 달달 외어 성명의리를 강설하는 일에 급급하였을 뿐 백성들의 실제생활에 도움되는 농업, 공업, 상업의 학문은 모두 末業小技라 하여 아주 천시하였다. 따라서 씨뿌리고 심는 방법, 쇠스랑을 쓰는 시기, 호미와 쟁기제도 등에 관한 고법이 전혀 없어 아무리 고명한 재주를 지닌 선비라도 과학적인 농법을 전혀 배울 수 없어 오로지 힘으로만 농사를 지을 뿐이다” 라고 질타하며 화가인 아우 추찬 이희영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여 농기도를 저술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농기도’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그 서문이 ‘북학의’외편에 수록되어 있고 ‘설수외사’에 일부 설명되고 있어 단편적으로나 알 수 있다. ‘설수외사’의 편찬동기도 백성들의 실생활에 이용하기 편리한(便利民生) 것이면 무엇이든 기록해 두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편리생민의 방편 가운데서도 특히 농기구에 관해 정성을 쏟아놓은 것이 또한 이책의 특성인데 그는 수많은 농기구 가운데 “우리 농민들에게 가장 필요하면서 그 이용하는 방도에 따라 몇배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농기구에 대해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렸다”고 밝히고 있다.


이희경은 특히 농업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에 학문적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영농의 기술혁신을 통한 농가의 소득증대는 그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따라서 농기구의 과학적 이용은 그가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었던바 水車의 이용에 비상한 관심을 가진 것도 바로 그의 이용후생학적 학문을 반영한 것이다.


그가 직접 제작하여 실험하고 그 쓰임새 등을 기록한 水車 ‘용미거’에 대한 설명은 지면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그의 사상과 출신을 끝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희경이 공자, 맹자, 관자, 주자 등 성현들이 제기한 경전의 논리를 끌어와 “먹는 일부터 먼저 해결하고 난 다음에 가르쳐야 한다”는 先食後敎 론은 곧 “利用然後 厚生 厚生然後 正德”할 수 있다는 이용후생학파의 이용후생론을 경전의 견고한 논리로 보완한 것이다. 이희경은 ‘이용후생’의 의미를 “생산도구를 과학적으로 이용하여 생활을 넉넉하게 만들자”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이는 ‘器用의 과학화’를 뜻한다.


그는 일하는 것을 이롭게 하여 효력을 몇 배로 끌어 올릴 수 있는 이점을 기용을 쓰는 근본이유라생각했고 기용중에서도 농기구의 이용을 국가농정의 선결문제로 꼽았다. 그의 설수외사에 제시된 호미, 고무래. 써래, 곰방메 등과 같은 몇가지 농기구는 농민들의 농사현장에 가장 기본적으로 이용되는 농기구이면서 이용하는 방도에 따라 생산력이 몇배나 증진시킬 수 있는 과학적 영농방안으로 제시된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대개 제초용이나 整地用농구로써 제한된 농토를 가진 우리나라의 집약농법에 가장 편리한 용구인바 이는 이희경이 경작면적의 단위당 수확률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구전법’과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연구와 저술에만 머물지 않고 몸소 농사를 지으며 구전법(區田法)을 실시하여 많은 수확을 거두기도 한 그야 말로 과학영농의 선구자이면서 시대를 앞서간 최초의 농학자임에 틀림없다.
[정리 李玲熙]



이희경(李喜經)은 누구?

1745(영조 21)∼?. 조선 후기의 학자. 강원도 홍천 출신.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성위(聖緯), 호는 윤암(綸菴)·십삼재(十三齋)·사천(麝泉). 조부는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의태(李宜泰)이고, 이소(李熽)의 다섯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 김익겸(金益謙)의 딸이다. 동생들은 이희정(李喜禎), 참봉(參奉) 이희명(李喜明), 황사영(黃嗣永)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천주교인 이희영(李喜英), 이희성(李喜成)이다.
1769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을 스승으로 섬기고 백탑시사(白塔詩社)를 결성하였다. 이 시절 그는 정철조(鄭喆祚), 서상수(徐常修) , 이덕무(李德懋) , 유련(柳璉) , 유득공(柳得恭) , 박제가(朴齊家) , 이서구(李書九) , 김용겸(金用謙) , 임배후(林配垕), 박재선(朴在先), 김순필(金舜弼), 백동수(白東修) 등 이른바 ‘연암그룹’과 어울려 학문을 연마하였다. 1780년(정조 4)에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홍천협(洪川峽)으로 들어가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구전법(區田法)을 실시하여 많은 수확을 거두기도 하였다.
1782년(정조 6) 10월에 남덕신(南德新)과 함께 1차로 연행을 하였다. 1786년(정조 10) 8월에 유득공 의 추천으로 대리검서(待理檢書)의 천망단자(薦望單子)에 올랐으나 입격하지 못하였다. 그해 겨울에 2차 연행하여 연경의 문사인 진숭본(陳崇本), 대구형(戴衢亨) 등과 시도(詩道)와 중국의 전각(纏脚)제도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스승 박지원 과 함께 와서(瓦暑)에다 중국의 기와 굽는 법을 설치하고 벽돌 제도 역시 중국의 제도를 본떠 벽돌 만드는 비용을 상당히 절감하였다.
1790년(정조 14) 그의 나이 46세 때 유득공 , 박제가 와 함께 상사막객(上使幕客)의 자격으로 제 3차 연행을 하였다. 이 여행에서 열하로부터 고북구를 두루 여행한 뒤 《입연기(入燕記)》를 지었다. 당시 그곳에서 보고 들은 벽돌 제도에 관한 설명은 《설수외사(雪岫外史)》에 실려 있다. 1794년(정조 18)에 제 4차 연행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물레방아의 제도를 자세하게 관찰하여 기록하였다. 1799년(정조 23) 그의 나이 55세 때 조정으로부터 주자서 10여 종을 구입해오라는 명을 받고 제 5차로 연행을 하였다.
1801년(순조 1)에 4월에 동생 이희영(李喜英)이 강이천(姜彛天) 등의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이희영은 당대 저명한 화가인 정철조를 사사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누가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상을 그리는 등의 일을 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1805년(순조 5)에 《설수외사》를 편찬하였다. 그해 10월 20일에 스승 박지원 이 서거 하였는데, 그는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 함께 스승의 임종을 지켜봤다.
그는 연암의 수제자로 이용후생의 학문을 그대로 계승한 인물이다. 그는 박제가 와는 둘도 없는 막역한 친구였는데 그 역시 서출의 신분을 지녔다. 특히 그는 무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 이소도 서출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신분적 질곡을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의 길을 걷는 대신 ‘실학’으로 농공상의 이익을 대변해야겠다는 자기각성을 하게 되었다.
그는 백성들의 가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심명물리(深明物理)’ 즉 물건의 이법을 널리 밝게 연구하여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자는 과학적 사유를 생활현장으로 끌어들여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고는 연행을 통한 청의 선진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더욱 발전하여, 〈농기도(農器圖)〉의 저술과 수차의 일종인 용미거(龍尾車)의 제작, 그리고 벽돌의 제작과 사용 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관련자료]
* 利用厚生學派의 成立과 李喜經의『雪岫外史』
저자명오수경 학술지 大東漢文學 제19집 (2003. 12) pp.435-471 출처大東漢文學會 문서유형학술지논문 발행일 2003
* 韓紙의 뿌리를 찾아서 10;북학의(北學議)와 설수외사(雪岫外史)중 종이(紙)
저자명김영복 학술지 製紙界 204('89.9) pp.22-26 출처한국제지공업연합회 문서유형학술지논문 발행일 1989
* 雪岫外史, 外二種
저자명李佑成 출처亞細亞文化社 문서유형단행본 발행일 1986



【사물을 대하면서】

세상의 사물은

귀하다고 지나치게 좋아해서도 안 되고

하찮다고 지나치게 버려두어도 안 된다.

天下之物 貴不可偏愛 賤不可偏棄

천하지물 귀불가편애 천불가편기

- 이희경(李喜經)의 《설수외사(雪岫外史)》중에서


{해설}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제자인 설수(雪岫) 이희경(1745~1805)의 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귀한 것만을 좋아하여 일상의 물건을 만들면서도 귀한 재료를 사용한다면, 귀한 것은 더욱 귀해져 정작 꼭 필요한 데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찮고 흔한 재료를 가공하여 잘 사용할 수 있을 때 세상의 물자는 풍부해지고 누구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얻기 힘든 금은보화보다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공기, 물, 흙이 우리에게는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사물이라도 모두 각각의 쓰임이 있습니다. 어디에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것입니다.

옮긴이 - 이정원(한국고전번역원)






綸菴 李喜經의 實學思想과 學問

(The Thought on Sil - Hak and Literatue of Lee Hee-Kyong)

저자 오수경

자료유형 학술지논문

발행처 安東大學

발행일 1993

목차

Ⅰ. 머리말 - '연암학파'에서의 이희경의 위치

Ⅱ. 생애,사승,교류 - 연암학파를 중심으로

Ⅲ. 실학사상과 이용후생의 학문

1. '이용후생'의 학문정신과 연암학파

2. 이용후생의 사상과 북학론

① '이용후생학'과 북학론의 전개

② '이용후생학'의 이론적 검토

3. 과학적 영농 이론과 『설수외사』

① 실용적 농서편찬

② 『설수외사』에 수록된 농기구 - 특히 '전기'를 중심으로

③ 구전법

Ⅳ. 맺음말
본문요약=이희경은 연암의 수제자로 이용후생의 학문을 그대로 계승한 인물이다. 그는 무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부친이 서출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적 질곡을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욱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과학을 통한 입신출세의 길을 서슴없이 포기하고 '실학'으로 농,공,상의 이익을 대변해야겠다는 '토'로서의 자기각성을 하게 되었다. 사로서의 자기신분에 대한 현실적인 자각은 곧 자신이 처한 경제적 현실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이러한 계기는 다시 자신이 딛고 생활해 나가는 이 땅의 가난한 민족현실에까지 확대되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양심과 책임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실천한 이용후생의 학문은 이와 같은 현실인식의 기반을 토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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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