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왕후 태봉(태실)

홍천의 역사 여행 정희황후 태봉(태실)

조선시대 최초 여성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정희왕후는 1418년(태종 12년)에 출생하여 1483년(성종 14년)에 사망하였으며, 본관은 파평, 시호는 정희, 존호는 자성이다. 1418년(세종 즉위년) 11월 11일 파평윤씨 윤번과 인천이씨 사이의 3남 7녀 중 9번째 딸로 태어났으며, 1428년(세종 10년) 10월 13일 11세의 나이로 진평대군 이유와 혼인하여 같은 달 19일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다. 이후 1468년(예종 즉위년)까지 14년간 왕비로 재위하였으며, 세조가 예종에게 왕위를 양위하여 정희왕후는 대비로 책봉되었다.
조선 8대 임금인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여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에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가 1469년부터 1476년(성종 7년) 동안 약 8년간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최초로, 여성에 의한 수렴청정이었다. 수렴청정기간 동안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종친의 관리 등용을 법으로 금지했으며, 정책적으로 유교 정책을 강화했으며, 왕실의 고리대금업 단속 및 농업을 장려하여 이를 통해 조선의 왕권이 안정화되었다.

태봉(태실)

태봉(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을 지칭하는 용어로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태에 대하여 중요시 여겨왔으며, 이는 지역별, 계층별 모두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일반적으로 태를 처리하는 방식은 3가지 방식으로서 불에 때우거나 물에 띄워 보내거나, 땅에 묻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정희왕후 태실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홍천군 산천의 공작산 홍천현의 동쪽 25리에 정희왕후의 태를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희왕후는 왕후 이전 민간의 신분으로 안태하는 의식을 거쳤을 것이며, 왕후로 명명된 이후 태실을 조성하여 이장한 것으로 사료 및 문헌을 통하여 역사학자들이 고증을 시행하였다. 태실을 수호하던 사찰은 현재 수타사 법당에서 수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현재 태실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으나 태석으로 보이는 석물들이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왕실과 밀접한 관계로 보이는 *하마비가 수타사 입구 부분에 조성되어 있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하마비: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로 왕장이나 성현, 명사·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