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의 독립운동사

홍천의 독립운동사

가장 빛나는 역사의 한 페이지,
홍천의 독립운동사를 되짚어보며

3∙1운동이 올해 92주년을 맞았다. 92년 전 대한민국 전역에 울려 펴졌던 ‘대한독립만세’,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처절하고도 숭고한 외침은 이제 반세기를 넘긴 현대에 이르러서도 가장 빛나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3∙1운동과 항일운동을 되새기고 그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강원특별자치도 홍천은 깊은 의미를 지닌 곳이다. 치열하게 전개됐던 독립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고스란히 남은 땅이 바로 홍천인 때문이다. 이곳을 돌아보며 지난 날 나라를 지키고자 격렬히 싸웠던 선현들의 애국충절과 그 숭고한 뜻을 되새겨 보자.

홍천은 4월 초부터 치열한 만세운동이 전개됐던 곳이다. 그로인해 10명의 주민이 일제에 피살되고 87명이 검거돼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대체텍스트

기미만세공원

강원특별자치도 최대 3·1운동 항거지역인 홍천에서 동창마을은 항일 구국운동의 불꽃이 타올랐던 역사의 장소이다. 동창마을에서 일어난 동창만세운동은 1919년 4월3일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려고 분연히 일어난 순수 주민운동이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은 동창마을에서 마방을 운영하던 김덕원 등 팔열사이다. 내촌면 동창마을을 시작으로 화촌면 서석면 내면 기린면에서 수천 군중이 응집해 자주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왜경의 무차별 총격에 8명이 서거했으며 수 십 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동창마을에는 이러한 만세운동의 의미를 후손들에게 알리고 열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기미만세공원을 조성되어 있다. 일제의 탄압에 항거, 만세운동을 하다 이곳에서 순직한 8열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1963년 관과 민이 합동하여 팔렬각을 건립하였고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팔렬각이 노후되자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선열들이 뜻을 기리고자 1990년 2월 28일에 기미만세공원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8열사를 비롯한 선현들의 애국충절의 높은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이룩한 곳이다. 만세운동 때 왜경에 의해 희생되신 팔열사의 애국혼을 담은 군상인 기미만세상에는 팔열사의 혼이 그대로 담겨있는 듯 하다. 기미만세공원 내에는 곳곳에 세워진 오석 표석으로 앙천루에 20여개, 남강로에 서너 개, 그리고 이곳에도 크고 작은 비석 14점이 있다. 공원 한 켠에는 쉼터도 자리하고 있어 그늘에 몸을 눕히고 잠시 쉬어갈 수 있다. 시간이 된다면 통일신라시대 홍양사터라고만 구전되어 내려오는 공원 뒤편의 절터를 들려보아도 좋겠다.

설악산 돌을 날라 독립 기초 다져놓고 청초호 자유수를 영 너머로 실어 넘겨 민주의 자유강산 이뤄 놓고 보리라.” (설악산 시조, 1906)

한서 남궁억 선생의 얼이 서린 곳,
홍천 모곡리

충절의 고장이었던 홍천의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바로 한서 남궁억 선생이다. 구한말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로 서재필, 이상재 선생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황성신문을 창간한 선생은 1918년 `보리가 잘 자라는 울타리'란 뜻에서`보리울'로 불리던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학교를 세우고 무궁화 보급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우리나라의 암흑기였던 일제시대에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군사적, 정치적 세력에 맞서 싸우며 한국의 새날을 열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던 애국자였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얼이 서려있는 곳, 바로 홍천 모곡리, 일명 보리울 마을이다. 항일운동의 본산인 이곳 모곡리는 남궁억 선생이 여생을 보낸 곳이다. 1919년 57세 되던 해에 남궁억선생은 이곳 보리울에 예배당을 짓고 모곡학교를 설립했다.

숭고한 넋, 이곳에 어리다 - 한서 남궁억선생 묘역

한서 남궁억선생의 묘역은 한서초등학교 뒤편에 위치해 있다.
지난 1977년에 조성된 남궁억 선생 묘역은 2000년 11월18일 강원특별자치도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됐다.